비행 시뮬레이션, 그리고 나

2007. 07. 09.

어디가서 이런 말을 하면 다들 웃곤 하지만, 나는 ‘비행기‘가 좋아서 공군에 지원했었다. 비행기가 나는 모습을 보는 것이 그냥 좋았으니까. 그런데 그 ‘그냥‘이라는 말에도 멀리 뿌리는 있다. (지금도 여행보다는 비행기를 타는 그 자체가 더 좋고, 하늘로 떠나길 기다리는 공항의 분위기가 더 좋다.)

비행기에 대한 동경이 생겼던 때가 언제인가 생각해보면, 그것은 아마 플라이트 시뮬레이션(Flight Simulation) 게임을 처음 접한 즈음일 것이다. 나는 초등학교 6학년 때 다니고 있던 컴퓨터 학원에서의 그 날이 아직도 생생하다. 옆자리 한 대학생 형이 흑백화면에서 무슨 계기판같은 것을 조종하고 있었는데, 키보드 한켠에는 두툼한 F-19라는 이름이 적힌 책(매뉴얼)도 있었다.

그날 나는 생애 첫 플라이트 시뮬레이션 게임인 F-19 Stealth Fighter를 접했다. 흑백화면에서 하늘을 낮게 날고 있던 그 까만 비행기는 단번에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뚫어져라 옆에서 쳐다보는 내가 신기했는지, 그 형은 매뉴얼을 선뜻 빌려주었고 난 그날 밤 매뉴얼을 읽으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요즘과는 달리 예전 게임의 매뉴얼은 굉장히 두툼했다.) 그 뒤 한동안 키보드(!)로 F-19를 조종했는데, 모니터 속에서 비행기를 띄우고 돌아다니는 것이 그렇게 신기할 수 없었다. 하지만, 착륙은 키보드로 하기에는 항상 어려운 일이었고, 30여분을 비행하고도 착륙에서 완파되는 경우가 많았다.(F-19는 지금은 F-117로 알려진 전폭기의 코드네임이었고, 당시엔 실물이 공개되지 않았기 때문에 게임에 묘사된 모습은 많이 달랐다.)

중학생이 되었을 때는 비행 시뮬레이션의 명작이라는 Falcon 3.0을 접했고, 제대하고서는 Falcon 4.0이 내 곁에 있었다. 그리고 혼자 하는 비행이 아닌 체계적인 공부를 위해 온라인 가상 비행단(VAFA)에서도 활동했다. 기본 비행, 그리고 각종 무기 운용에 이르기까지 게임 하나를 위해 전공서적과 같은 책들을 읽고, PDF로 출력해서 보곤 했다. 내가 복무했던 비행장에서도 게임과 같은 (K)F-16을 운용했기 때문에 한결 배우는 것이 편하게 느껴졌다. 매주 금요일 저녁에는 사람들과 같이 온라인에서 만나 비행을 하곤 했다.

교신이 필수였기 때문에 헤드셋과 키보드를 대체할 수 있는 스틱이 필요했다. F-16 실기의 스틱과 쓰로틀을 본뜬 FLCS와 TQS는 좀더 쾌적한 조작을 도와줬고 거의 키보드에 손을 댈 필요가 없었다. 우리는 브리핑을 했고, 미션을 수행하고 나서는 기록(log)을 남겼다. 현실처럼 몸을 압박하는 G-Force는 없었지만, 작은 모니터 화면 속에서 가상 조종사들은 밤의 하늘을 맘껐 즐겼다. 종종 온라인이 아닌 오프라인에서도 우리는 같이 비행하는 것만으로도 밤이 짧았다. 이제 그 기억들은 많지 않은 스크린샷 속에 남아 있지만, 여전히 우리의 꿈들은 반짝이고 있다.

- 가즈랑

비행 시뮬레이션, 그리고 나 & 대화들

  1. 저는 진짜 \'시뮬레이션\'이라 할 수 있는 플라이트 시뮬레이터류보단 SF 비행 시뮬레이션 게임을 좋아했습니다.. 아주 옛날 X윙, Y윙, 타이파이터~같은 스타워즈 비행 시뮬 게임이랑 윙 커맨더 시리즈 같은 거요.. 근데 그 이후론 이런 SF 비행 시뮬 게임은 거의 안 나오는 것 같아요.. 2007. 07. 10.
  2. 펄님이 스타워즈 구공화국의 기사단을 좋아하시는 이유가 있었군요.^ ^; 저도 말씀해주신 X윙, 타이파이터 시리즈 아주 좋아했어요. 마지막 Death Star미션이 아직도 떠오르네요~ 그런데 저는 아직 KOTOR는 해보지 못했어요. 명불허전이라고..나중에 꼭 해보고 싶은 게임이긴 해요. 2007. 07. 10.
  3. #

    duoh5log

    엑스윙 이런 게임 너무 어렵던데... 2007. 07. 10.
  4. 저도 까까머리 시절에 헬파이어와 사이더와인더를 날려대며 모니터 앞에서 꽥꽥(?) 거리던 기억이 선합니다. 정말 즐겼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시뮬레이션 게임과 멀어졌군요. 사실 이제는 게임 자체를 거의 안하고 사는 편입니다. 동호인들과의 온라인 비행이라.. 참 설레이는 경험이었겠습니다. 2007. 07. 10.
  5. 그런가요? ^ ^; 저는 X-wing시리즈는 엄밀한 의미에서 아케이드성이 짙은 게임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아, 그런데 단순히 쏘고 하는 것이 아니라, 조종석에 앉아있기 때문에 봐야할 계기판도 존재하고 그래서 두오님처럼 느끼실 수도 있겠네요. 매뉴얼을 보기 전에는 어떻게 무기를 발사하는지도 몰랐어요. 지도도 줄 모르고;; 다만 영화에서 본 그 감동을 게임에서 다시 느낄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더 좋아하게 되었던 걸 수도 있어요. 2007. 07. 11.
  6. 헬파이어(Hellfire)면, 헬기에서 발사하는 대전차 미사일 말씀하시는 거죠? 그럼 헬기 시뮬레이션도 해보셨다는 얘기네요.^ ^; 저는 코만치 시리즈를 좋아했어요. 건십도 해보긴 했지만, 이상하게 헬기 시뮬레이션은 많이 좋아하게 되진 않더라고요. 저는 오히려 민항 시뮬레이션에서 설레임을 가져서 계속 비행 시뮬레이션을 좋아하게 되었구요. 온라인에서 사람들과 같이 하늘을 날고 있는 기분, 첨단 기술이 가져다준 굉장히 독특하고 아름다운 경험이었어요. 4명이 갈매기들처럼 편대를 이루어 날면서 담소를 나누던 때가 또 그립네요. 2007. 07. 11.
  7. 사진들은 예상대로 모두 남자들이네요. ㅎㅎ
    여자 가상 조종사들은 없었나요?
    모습이 너무 정겹습니다.
    그 중에 미투로그 문패로 쓰는 사진이 있었군요. : ) 2007. 07. 12.
  8. 예상이 맞습니다.^ ^ 저도 한번도 여자분하고 비행해본 적은 없으니까요. 그런데, 한번은 어느 교관비행사의 부인분께서 중간에 교신에 들어오셔서 다들 재미있게 이야기했던 적은 있네요. 다들 비행하느라 좀 정신없었던 상황이었지만 ㅎㅎ 말씀대로 미투로그에 썼던 사진이 있죠. 예리하세요~

    언젠가 다시 시간과 여건이 되면 꼭 다시 돌아아고픈 곳이에요. 지금은 그때 같이 비행하던 분들이 운영진으로 계시더라고요. 정겨운 곳 맞습니다. ^ ^ 2007. 07. 12.
  9. 오오~ 멋지네요. 저도 한 때 비행 시뮬 게임에 관심이 있었는데 ... 난이도가 너무 높아 포기한 적이 있었습니다. ^^; 2007. 07. 14.
  10. 저도 전에 몇번을 포기하다가 결국 사람들과 같이 배우면서 익숙해졌습니다. 이론이 튼튼해도, 막상 스틱과 버튼들을 얼마나 잘 운용하느냐가 중요하기 때문에 연습 또 연습이 필요하고요. 그 과정에서 이게 과연 게임인가 하는 의문도 들기는 했습니다. 제가 군에서 보았던 KF-16의 교범들과 비교할 때도 매뉴얼의 정확함과 내용의 방대함은 뒤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실제 ALERT ROOM(비상대기실)에서 조종사들이 휴식중에 할 수 있게 설치해놓은 게임도 이것이고요. 조종사분께 제가 Falcon에 대해 직접 물어보니, 공대지 무장운용은 좀 차이가 있지만 공대공의 경우는 실제와 거의 흡사하다고 했습니다. 조종사들이 얼마나 오랜 시간을 거쳐 한가지 무장운용을 숙달하는지 생각해보면 비행 시뮬이 결코 쉽지는 않은 장르라는 걸 새삼 느낍니다. 2007. 07.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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