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중세- 기형도

2007. 05. 10.

최근까지도 진행되고 있는 돌림종이(도서문답)는 제가 블로거가 되었다는 느낌을 받은 하나의 사건이었지요. 그와 더불어 다른 분들이 어떤 자세로 책을 대하는지 살짝 엿볼 수 있는 기회도 되었고요. 솔직히 짧은 글로 사람의 독서내력을 써내려간다는 것 자체가 무리이긴 하지만. 그 중에 민노씨의 도서문답은 인상적이었는데, 어떤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작가-기형도-가 목록에 있어서 글을 적어 봅니다.

제가 대학1학년 때, 그러니까 지금부터 7년전쯤. 그 때도 지금처럼 겨울을 지나 먼지가 이제 일어나려하는 계절이었습니다. 작은 모임에 속해있던 터라 많은 사람들을 만나는 기회가 특별한 노력없이도 그냥 주어졌던, 어떻게 보면 행복했던 때죠. 대학와서 처음 맞은 생일에 어느 여자선배가 책 안쪽에 손글씨로 이 시를 적은 책을 줬습니다.

내 인생의 中世

- 기형도

이제는 그대가 모르는 이야기를 하지요
너무 오래되어 어슴프레한 이야기
미루나무 숲을 통과하면 새벽은
맑은 연못에 몇 방울 푸른 잉크를 떨어뜨리고
들판에는 언제나 나를 기다리던 나그네가 있었지요
생각이 많은 별들만 남아 있는 공중으로
올라가고 나무들은 얼마나 믿음직스럽던지
내 느린 걸음때문에 몇번이나 앞서가다 되돌아 오던
착한 개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나는 나그네의 깊은 눈동자를 바라보았지요

bit로 전달되는 시가 얼마만한 힘을 갖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때 선배의 손으로 적은 시가 주는 힘은 제겐 무척 컸습니다. 마치 잘 그려진 유화를 보는 느낌이랄까요. 푸른 빛이 감도는 그리고 따뜻한 말이 담긴 이 시로 인해 기형도에 대한 어떤 이미지가 순식간에 만들어졌습니다.

군대를 다녀와서 저는 학부에서 계속 수업을 듣고 그 선배는 옆 대학원에서 비교문학을 전공하고 있었습니다. 어쩌다가 엘리베이터 안에서 선배와 마주치면 옛날에 적어준 기형도 시를 아직도 기억한다고 말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것은 좋은 시를 알려줘서 감사하다는 말의 다른 표현에 불과했지만요. 선배에게 그 책은 단지 한 후배에게 전하는 선물에 불과했지만, 좋은 시는 그렇게 그렇게 전해져 가나 봅니다.

- 가즈랑

댓글 보기(15)tags :

내 인생의 중세- 기형도 & 대화들

  1. 가즈랑님의 글을 읽다가 삘 받아서 짧게 끄적거렸습니다. : )
    트랙백 보내요. 2007. 05. 11.
  2. 기형도와 나...

    #. 가즈랑님의 글을 읽고, 문득, 즉흥적으로 떠올려봅니다. 기형도와 나 1. 내가 처음 읽은 기형도는 권택영이 읽은 기형도였다. 어떤 잡지인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데, 아마도 [외국 문학]... 2007. 05. 11.
  3. 예전 편지라는 영화에 나오는 시. 처음 이게 무슨 얘기인가~
    전혀 감을 못잡았는데 계속 읽어보니 나중에 알게되더라구요.
    무릎을 탁 치고 아하! 이런 느낌이랄까. 기분 엄청 좋더군요.

    시얘기가 나와 주절주절 적어 봤습니다. :) 2007. 05. 11.
  4. #

    가즈랑

    변변치 않은 스케치같은 글에 먼 글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읽겠습니다. :) 2007. 05. 11.
  5. #

    가즈랑

    어떤 시인지는 모르겠지만, 사람에게 벼락처럼 다가오는 시, 그게 진짜 시가 주는 즐거움이 아닐까 싶네요.

    uterus님이 보신 시가 어떤 것인지 궁금해지네요. :) 2007. 05. 11.
  6. 황동규 님의 [즐거운 편지]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 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즘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

    이 시입니다. :)
    작가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도저히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의 큰 사랑입니다.
    물론 처음 읽었을 땐 이해 못했지요. ㅋ 2007. 05. 11.
  7. 컥 제목이 빠졌는데 댓글 수정이 안되는군요 ㅠㅠ
    황동규님의 입니다. 2007. 05. 11.
  8. 커걱! 이런... 각진 괄호를 인식을 못하는군요... ㅠㅠ
    제목은 \"즐거운 편지\"입니다. 2007. 05. 11.
  9. #

    가즈랑

    제가 제목 대신 수정해 드렸습니다. 관리자는 되고 손님이 쓴 글에서는 각진 괄호가 안되고..좀 나쁜 코멘트 기능입니다.^^;; 2007. 05. 11.
  10. #

    가즈랑

    올려주신 시 잘 읽었습니다. 사랑을 이렇게도 표현할 수 있구나, 그런 대상이 도대체 뭘까 생각해봤습니다. 사랑을 시작하는 사람들이라면 참 좋아할 시가 아닐런지. ^^;

    즐거운 편지라는 제목도 잘 어울립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보내는, 또 그로부터 받는 편지는 늘 즐거울 겁니다. ^^ 2007. 05. 11.
  11. 고등학교 1학년 때 문학시간에 선생님께서 가르쳐주신 방법이 있는데 그 후로 시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골자는 시인의 심상을 이해한다는 것이었는데 구체적인 방법은 시의 각 행마다 그 장면을 떠올리며 시 전반에 걸친 영상을 만들어내는 것이었습니다.
    오랜만에 두 시를 감상하니 온갖 옛 생각이 다 떠오르네요. 가즈랑님도 uterus님도 나눔에 감사드려요. 2007. 05. 12.
  12. #

    가즈랑

    훌륭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시를 가장 잘 이해하는 방법 중 하나가 직접 시 속으로 들어가보는 것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정경을 잘 볼 수 있어야지요.

    그나저나 요즘은 시를 통 읽지 못해서 마음이 딱딱해지는 느낌이었는데, 이렇게 두편의 시를 보니 단비가 내린 기분입니다. 2007. 05. 12.
  13. 기형도를 추억하다...

    기형도그를 처음 만난 것은 물리교생으로 온 선배의 권유 때문이었다.선배는 두권의 시집을 선물했는데하나는 류시화의 \'나는 내가 옆에 있어도 그립다\' 였고하나는 기형도의 \'입속의 검... 2007. 08. 26.
  14. 민노씨의 글을 발아점으로 하는 트랙백을 걸어봤습니다. 저 역시 선배에게 이 시를 받았구요. 그 지독하고 찬란했던 중세. 기형도를 추억할 수 있는 발아점을 제공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자주 인사드릴 것 같내요. ^^ 2007. 08. 26.
  15. egoing님 감사합니다. 긴 글 속에 egoing님의 기억이 많이 들어 있네요. 저는 이 시와 관련해서 아주 찰나와 같은 짧은 기억만 있습니다. 기형도를 잘 알지 못하면서도 짧은 글을 적었는데 그 글이 이렇게 돌아서 다른 분들의 기억을 건드리고 다녔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2007. 08.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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