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일우

2008. 04. 21.

보통 좀처럼 만나기 힘든 기회를 ‘천재일우(遇)‘라고 표현합니다. 천년에 한번 올까말까한 만남이라는 뜻인데, 원래 그 표현이 쓰였던 맥락(주군과 신하의 만남)과는 좀 달라지긴 했지만, 그 속에 담긴 뜻은 여전히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합니다.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꺼낸 것은 많은 분들이 신문과 각종 미디어를 통해 지켜봤을 ‘삼성특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였습니다. 처음 김용철 변호사가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사제단)을 통해 발표한 양심선언을 보면서 저는 이런 기회가 또 올까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어디 저뿐만의 생각이었겠습니까..

그토록 공고한 삼성 공화국의 심장부에서, 가장 내밀한 조직인 법무팀을 이끌고, 앞장서서 조직적인 불법행위를 수행하면서, 하지만 일말의 양심을 지니고 그것을 폭로할 만한 용기를 갖춘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제 생각에 너무도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을 키워주고 신의를 주었던 조직에게 칼끝을 겨눈다는 것은 일개 소모임에서도 하기 힘든 일이지 않습니까.

많은 사람들은 이런 김용철 변호사의 행동에 대해 ‘배신자‘라는 외피만을 씌워서 그 의미를 애써 깎아내리려고만 했습니다. 그 와중에 삼성에서는 ‘고맙습니다’ 캠페인을 지겹도록 내보내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여줬고요.

누가 정의의 편인지 누가 마땅히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할지 저는 보고 싶었고,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김용철 변호사의 폭로로 시작된 특검의 수사진행을 기대에 찬 눈으로 지켜봤습니다. 하지만 특검의 결과발표를 지켜보면서 이 천재일우의 기회와 그것에 걸었던 기대는 산산이 날아가버렸고 이것이 저는 너무도 아쉽습니다. 특검의 수장이라는 사람이 도리어 변호인이 된 듯 조목조목 무혐의를 나열하는 대목에서는 솔직히 기가 찹니다. 불법 전환사채에 대한 사안은 사실 이번 특검에서 주공으로 삼아야 할 대상이 아니고, 오히려 그동안 소문만 무성했던 정,관계 로비의 실체를 입증하는 것이 더 중요한 문제였는데도 특검은 면죄부(표현의 과격함에도 불구하고)를 주고 말았습니다.

법과 질서에 대한 목소리가 점점 크게 들리는 시대가 왔습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런 구호를 외치는 그들의 목소리에는 전혀 남을 설득시키는 힘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더 잘 알고 있겠죠?

저는 이 놓쳐버린 기회가 다신 못 오지 않을까 걱정스럽습니다. 그런데 이런 걱정은 여태까지의 모습만 봤을때 그렇다는 겁니다. 이번 삼성특검과 MB특검을 지켜본 우리 사회는 제2, 제3의 김용철 변호사를 낳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우리 사회가 정말 부끄러운 단면을 가지고 있다는 이 집단적인 체험의 학습효과를 누가 폄하할 수 있을까요. 이런 바로잡음의 움직임이 또 언제 나올 것인지는 시간문제에 불과하다는 확신을 갖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짧지만 이 포스팅을 웹이라는 공간에 기록으로 남깁니다. 아직까지는 우리사회에서 법적 정의라는 지향은 판결문보다는 마음 속의 바늘이 더 잘 가리키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 가즈랑

천재일우 & 대화들

  1. 역시나 즉흥적으로다가.. 트랙백 쏩니다. ㅡ.ㅡ; 2008. 04. 22.
  2. 삼성특검의 학습효과 : 김용철과 조준웅,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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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한 번 생각해 볼 만한 주제입니다. 저도 희망쪽에 걸고 싶습니다. 2008. 04. 22.
  4. 민노씨 // 즉흥적인 글에 이렇게 긴 장문의 글을 트랙백까지 보내주시다니..^ ^;; 덕분에 제 글을 더 꼼꼼히 읽어봤습니다.

    미리내 // 들러주셔서 고맙습니다. 완전한 비관 혹은 희망이란 사실 틀린 말 같기도 합니다. 이런 일이 터진 직후에는 주로 비관적 목소리가 많고 좀더 시간이 지나고 힘을 비축하면 다시 희망으로 돌아서겠지요.. 2008. 04. 22.
  5. 이젠 정말 뉴스를 보기도 듣기도 싫습니다. 2008. 04. 23.
  6. 이정일 // 요즘 TV를 보면서 좀처럼 기분이 좋았던 때가 없었던 듯 싶습니다. 다들 비슷하게 느끼고 있는 거 같네요... 2008. 04. 24.
  7. 꽈배기하고 스크류바만 먹고 자라서일까요(퍽-). 이미 이런 식으로 끝날 걸 짐작했기에...그리고 그렇게 끝이 났기에 무덤덤한 기분마저 듭니다. 이러면 안 되는데 희망을 버리면싶지만서도 허망함은 어찌할 수가 없네요.

    부디 가즈랑님의 확신대로 \'바로잡음의 움직임\'이 나오길 기대합니다. 저 스스로도 정신차리고 살아야할테구요. 2008. 04. 26.
  8. 정신나간 사람들...

    제목 : “관심분야 10배, 100배 집중 이건희 회장 천재형 같더라” (문화일보)특검팀 관계자는 21일 “피의자나 참고인 조사할 때 가장 중요한 게 먼저 말문을 트는 것”이라며 “이 회장을 조... 2008. 04. 26.
  9. 정말 그렇습니다. 단군이래 최고수준의 공익제보의 몰락을 우리는 그냥 지켜볼 수밖에 없는 걸까요? 2008. 04. 26.
  10. egoing // 안타까운 마음에 저도 이 글을 트랙백 보냈습니다.. 2008. 04. 27.
  11. 씁쓸하고 씁쓸합니다.
    헐리우드 영화보다도 못한 현실이 너무도 쓰립니다. 2008. 05. 1.
  12. 써머즈 // 아...제 블로그에 처음으로 답글을 남겨주셨네요. 반갑습니다. 말씀하신 것 그대로입니다... 2008. 05.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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