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가지 밤

2007. 08. 06.

책 제목만 보면 유럽 어느 젊은 작가의 소설 제목처럼 들립니다. 밤에 대한 이 감각적인 표현에서 어딘가 발랄함이 느껴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일곱가지 밤을 떠올린 작가는 200년도 훨씬 전에 살다 간 조선의 ‘이옥’(1760~1815)이란 선비입니다. 이 책은 PrinceAB님의 블로그에서 소개글을 우연히 읽게 되면서 알았는데, 읽고 나서는 그 책의 내용이 못견디게 궁금해져 버렸네요. 좋은 책을 찾아내는 안목이 부족한 저는 이렇게 (좋은) 책을 소개 받을 때 이루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을 느낍니다. 그래서 그날로 근처 서점엘 가봤는데, 조금 놀란 것이 이 책은 아동용 도서로 분류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도 여느 아동용 책들과 마찬가지로, 어른이 읽으면 더 빛을 발하는 책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책은 작고, 글씨는 적당하게 크고 행간은 넓습니다. 저는 이것이 문장마다 담긴 이옥의 시선을 잘 드러내주는 의도적 편집이라고 생각합니다. 번역하신 분(서정오)은 문자의 옮김에 그치지 않고 아주 쉽게 풀어쓰고 문장에 생생함을 불어넣었습니다. 이렇게 읽기가 수월하고 감정이 살아있는 문장은 번역자의 공이라고 생각됩니다. 이옥에 대한 소개는 책에도 나와있지만, 한국일보 ‘한국 고전문학사 라이벌12’ 이옥 vs 김려 편에서는 좀더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네요. 틀에 얽매이지 않은 문체, 그리고 사소한 대상에 대한 애정어린 글쓰기가 이옥의 이름이 주목받게 된 가장 큰 이유입니다. 과거시험이 요구하는 문체를 거부하고 ‘소품문’(이야기하듯 말하는)을 고집하다가 성균관에서 쫓겨나고, 군역형을 받고 결국 낙향해 농사를 짓는 그의 일생은 어찌 보면 실패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불행한 개인사로 인해 그의 진정성이 알려지지 않았을 뿐, 그의 글이 조금 일찍 사람들에게 알려졌다면 우리가 접하는 고전문학의 세계는 좀더 풍성해졌을 텐데 안타깝습니다. 이옥이 가졌던 삶에 대한 즐거운 시선은 글 여러 곳에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그 표현들은 찰나에 불과한 생각을 잘 잡아내고 있습니다. 끝으로 제가 인상깊게 읽은 구절을 몇개 옮겨 봅니다. 이옥은 심생의 목소리를 빌려 사랑의 표현을 가감없이 말하고 있습니다. 아름답지요. 솔직한 심정을 감추는 것이 미덕인 시절이었음을 감안한다면 더 그렇습니다.

-심생과 처녀 편(심생이라는 귀족청년과, 부유하지만 신분이 낮은 처녀의 사랑 이야기)에서

당장 그 뒤를 따라가 봤지. 바짝 따라붙어 보기도 하고, 옷소매로 슬쩍 스쳐 지나가 보기도 하면서, 한시도 눈을 보자기에서 떼지 않았어…살짝 보니 그 안에 한 처녀가 들어 있는데 참 곱게 생겼어. 뺨은 복숭앗빛으로 발그스름하고 눈썹은 버들잎처럼 곱고, 푸른 저고리에 다홍치마를 입었는데 분 냄새가 솔솔 풍기는 게 언뜻 봐도 참 절세미인이야.

…그러다 보자기가 휙 벗겨지면서 버들잎 같은 눈과 별 같은 눈동자 넷이 딱 마주쳤지. 그러니 얼마나 놀라고 부끄러웠겠나. 처녀는 얼른 보자기를 거두어 도로 덮어쓰고 막 도망을 갔어.

…”너희들은 오늘 밤 위채에 가서 자라.” 하네. 여자 종들이 둘 다 나가자 처녀는 벽장에서 열쇠를 꺼내어 자물통 채워 놓은 것을 풀더니, 잇따라 뒷문도 열고 나서 심생을 부르는 거야. “도련님은 방으로 들어오세요” 심생은 이러쿵저러쿵 생각할 겨를도 없었어. 저도 모르는 사이에 벌써 몸이 방으로 들어가 있는데 뭘.

- 가즈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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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가지 밤 & 대화들

  1. 읽어봐야겠지요? ^^ 2007. 08. 7.
  2. 저도 얼른 사서 한번 봐야겠네요. 이글을 딸에게 읽어주면 이제 열흘 됐는데 알아들을까요. ^^; 2007. 08. 7.
  3. 이메일주소때문에 스팸처리되는건지 확인해보고자 한번 더 댓글을 달아봅니다. 2007. 08. 7.
  4. 읽으면 옛날에 살았던 우리 또래의 사람들이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 땅에서 살았던 사람들이라 더 신기하기도 하고요.

    덧) 아 아직 미국에 가신 것이 아닌건가 보네요. 방학 때는 한국에 계속 계시는 것인지..^ ^ 2007. 08. 7.
  5. 오호호. 남여상열지사의 분위기가 모락모락~
    음, 그래서 좋다는 겁니다. 으헤헤. +_+ 2007. 08. 7.
  6. 그 시대에 소품문을 쓰셨다니, 참 흥미가 갑니다. 가즈랑님께서 \'어른이 읽으면 더 빛을 발하는 책\'이라고 말씀해수신 것에도 끌리구요. 고전문학, 아니, 사실 한국 문학은 많이 접하지를 못하고 사는데 이렇게 자세하고 세심하게 적어주신 리뷰를 보니 읽고픈 마음이 한가득해지는걸요. :) 2007. 08. 7.
  7. 여름방학은 꽤 길어서요 ^^
    찾아보니 근처 시립도서관에 없어서, 인터넷으로 주문해야겠습니다 :) 2007. 08. 7.
  8. 삽화도 많고(다만 좀 추상적인 그림이 대부분이라 아쉽지만), 무척 쉬운 문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한자로는 간단할 단어들도 풀어써줬기 때문에, 아이들이라도 무난하게 이야기를 읽을 수 있을 겁니다. ^ ^ 내용도 교훈적인 이야기들이 많아서 얻는 것도 있을 테고요.^ ^ 2007. 08. 8.
  9. 전에도 불편을 드린 적이 있었는데, 그때 모든 글을 스팸 해제시켜드리지 못했던 거 같습니다. 오늘도 제 불찰로 늦게 글을 살려드렸네요. -_-; (어떤 알고리듬에 의해서 이렇게 스팸으로 분류하는지 참...죄송할 따름입니다) 2007. 08. 8.
  10. 도서관 뿐만 아니라, 꽤 크다고 하는 서점(심지어 영풍문고도)에서도 찾기가 힘들었습니다. 미리 전화를 넣지 않았으면 헛걸음했을지도 몰라요. 한국에서 즐거운 휴식 즐기다가 가세요~ 2007. 08. 8.
  11. 저도 남여상열지사를 소재로 한 이야기를 참 좋아하는데..저 글은 사실 옮긴 부분 말고는 참 슬픈 이야기에요. ^ ^; 그리고 이옥의 전집 가운데 일부 산문만 추려서 번역했기 때문에 남은 이야기들이 무척 궁금하기도 해요. 2007. 08. 8.
  12. 추구하는 글쓰기 때문에 부귀영화를 포기하라면 저는 못할 거 같은데, 이옥은 글쓰기를 목숨처럼 여겼던 거 같습니다. 어쩌면 솔직한 글쓰기의 진정한 매력을 일찌기 알아내고 그래서 그것을 지키고자 했는지도 몰라요. 비록 번역된 것이지만, 이렇게 시간을 뛰어넘어 신선한 소재와 글쓰기를 접하는 것은 행복한 일이에요. 저도 다른 분들의 소개글에서 고마움을 느끼니 이런 자잘한 일이라도 보태고 싶어지네요. 2007. 08. 8.
  13. 알려지지 않은 주옥 같은 고전문학이 참 많지요. 학생시절에는 \'그 시대에 그런 문장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라는 의문들이 많았답니다. 나중에 나이가 들고 여유가 생기면 한권씩 모아가며 찬찬히 읽어보려고 합니다. 이 책도 형편이 되면 꼭 구해서 읽어봐야겠군요.
    그나저나 이 책이 아동용으로 분류되었다니 상당히 이상하군요. 아무리 근래에 새로 번역이 되었다고는 하나 엄연히 성인문학인 것 같은데 말이죠. 2007. 08. 8.
  14. 헛다리 짚었군요. -_-;
    죄송합니다. 왠지 숙연해지는 기분입니다. 슬픈 이야기라니...헉. 2007. 08. 8.
  15. 그럴 수 있지요 ^ ^; 책에 나와 있는 대부분의 내용들은 교훈적인 이야기들이고, \'심생과 처녀\'는 오히려 예외입니다. 하지만 사랑 이야기가 저는 제일 재미있게 읽히더군요. 2007. 08. 9.
  16. 한국적인 정서랄까(꼬집어 말하라면 대답하기 힘들지만..) 그런 게 여기에 담겨 있어요. 완전히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은근한 감정이 담겨 있는 그런 글들. 저는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글들도 참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예전에 서정주 시인이 삼국유사가 자신의 작품에 동기를 줬다고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생각해보면 서정주 시인의 시어와 이미지는 고전문학의 연장선에 있다고 여겨지네요.(그분의 작품외적 행보는 논외로 치고요..) 2007. 08.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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